기업 경영은 숫자의 게임일까, 아니면 비즈니스 구조를 설계하고 장기적인 경쟁력을 쌓아가는 행위일까. 물론 회계와 재무는 기업 운영에서 필수적인 도구다. 그러나 그 도구를 목적으로 착각하는 순간, 경영은 본질에서 멀어진다.
1. 비생산적 노력의 낭비
회계를 ‘예쁘게’ 만드는 데 들어가는 노력은 본질적으로 비생산적이다. 숫자를 조정하고, 항목을 분류하고, 재무제표가 깔끔하게 보이도록 다듬는 일은 기업의 본질적인 가치 창출 활동과 거리가 멀다. 문제는 이런 작업이 단순히 몇 시간이 아니라 엄청난 자원과 인력을 빨아들인다는 점이다. 회계팀뿐만 아니라 사업부의 보고, 각종 내부 감사, 심지어 CEO 자신이 직접 개입하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공을 들여 만든 ‘깔끔한 장부’는 투자자 프레젠테이션에서 몇 분 보여주고 잊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업의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면, 그 시간은 고객 가치를 높이거나, 제품 혁신을 하거나, 새로운 시장을 탐색하는 데 써야 한다. 그런데 재무쟁이 CEO들은 이 에너지를 숫자를 다듬는 데 소모한다. 이건 본질적으로 기업가 정신과는 정반대다. 고객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거나 산업의 룰을 바꾸는 혁신은 뒷전으로 밀리고, ‘표면상 좋아 보이는 장부’가 우선순위가 된다. 그 결과, 회사는 단기 성과는 유지할 수 있지만 장기적 성장은 가로막힌다.
2. 회계의 현실
회계는 비즈니스 구조를 해석하는 도구가 아니라, 정해진 규칙에 따라 숫자로 표기하는 도구다. 재무제표는 기업 활동의 결과를 일정한 형식에 맞춰 정리한 기록일 뿐, 그 자체가 사업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기록된 숫자에는 객관성이 담겨 있지만, 그것만으로 기업의 가치를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기업의 가치는 수치로 포착되지 않는 부분에서 만들어진다. 브랜드 파워, 고객 충성도, 기술 혁신, 조직의 학습 능력, 공급망의 안정성 같은 요소는 회계 장부 안에 정량적으로 담기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장기 경쟁력과 시장 지위를 결정짓는 핵심 요인이다. 숫자가 보여주는 건 전체 중 일부일 뿐, 중요한 맥락은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마치 ‘통계의 오류’와 비슷하다. 통계 수치 자체는 정확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론이 도출된다. 예컨대 평균치만 보고 집단의 특성을 단정하면, 분산이나 분포 같은 본질적 요소는 무시된다. 회계 숫자 역시 마찬가지다. 숫자 그 자체보다, 그 숫자를 어떤 맥락에서 해석하고 활용하는가에 따라 현실과의 괴리가 발생한다.
재무쟁이 CEO들의 문제는 이 점을 간과하는 데 있다. 숫자가 곧 현실이라고 믿고, 재무 지표가 개선되면 곧 기업 가치도 상승한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회계적으로는 이익이 늘어난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 과정에서 고객 만족이 떨어지거나 핵심 인재가 이탈한다면 장기적 가치는 오히려 줄어든다. 결국 숫자에 집착할수록, 숫자가 담아내지 못하는 가치는 무너진다.
3. 자원 배분의 퀄리티
경영의 본질은 자원 배분이다. 이 점에서 경영과 투자는 다르지 않다. 투자자가 어떤 기업에 자본을 배분하듯, CEO는 기업 내부의 여러 사업 중 어디에 자원을 몰아주고 어디를 정리할지를 결정한다. 둘 다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성과가 갈린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은 행위다.
하지만 재무쟁이 CEO들은 이 자원 배분의 퀄리티보다 외형적으로 균형 잡힌 그림을 만드는 데 몰두한다. 투자자에게 보여줄 때 안정적이고 예쁘게 보이는 구조가 우선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장기적 수익률을 극대화할 기회가 희생된다는 점이다.
마치 일부 투자자가 실제 알파를 낼 수 있는 기회는 외면한 채, 보기 좋은 포트폴리오만 꾸미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어떤 투자자들은 실제 알파를 낼 수 있는 기회를 깊게 파고들기보다, 단순히 ‘보기 좋은 포트폴리오’를 꾸미는 데 집중한다. 겉으로는 위험 분산이 잘 된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 수익률은 평균 이하로 수렴하기 쉽다.
이런 접근은 기업의 혁신을 가로막는다. 불확실성이 크더라도 미래를 위해 투자해야 할 영역은 ‘위험하다’는 이유로 외면하고, 기존 사업의 유지·보수 같은 보수적 선택에만 돈이 흘러간다. 단기적으로는 안정적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경쟁사보다 뒤처지고, 시장 변화에 대응할 힘도 잃어버린다.
4. 왜곡된 자본 배분 — 보상 구조
재무쟁이 CEO의 문제는 단순히 자원 배분의 질이 낮다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보상 구조가 자본 배분을 왜곡한다는 점이다. 많은 기업에서 CEO 보수는 단기 EPS, ROE, 주가 같은 지표에 직접 연동되어 있다. 이런 환경에서는 기업의 장기적 내재 가치를 높이는 선택보다, 분기마다 숫자를 끌어올리는 선택이 우선시된다. 장기 성장을 위해서는 당장 비용처럼 보이는 연구개발, 브랜드 투자, 인재 확보에 돈을 써야 하지만, 이런 지출은 당장 EPS를 악화시킨다는 이유로 잘리기 쉽다. 반대로 단기 지표를 예쁘게 만드는 결정은 보상으로 직결되기 때문에, 의사결정은 자연스럽게 왜곡된다.
이런 왜곡은 재무쟁이 CEO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영업 출신 CEO라면 보상 기준이 매출 성장률에 걸려 있을 때, 고객 획득 비용이나 채널 비용을 무리하게 늘리며 시장 점유율만 키우려 한다. 기술 출신 CEO라면 화려한 신기술 프로젝트에 집착해, 아직 수익 모델이 검증되지 않은 개발에 과도한 자본을 투입하기도 한다. 유형은 다르지만, 보상 체계가 단기 지표에 묶여 있으면 누구라도 잘못된 자원 배분에 빠지게 된다.
이 왜곡의 대표적 사례가 자사주 매입이다. 자사주 매입은 본래 기업이 저평가된 주식을 사들여 남은 주주들의 가치를 높이는 훌륭한 수단이다. 그러나 단기 EPS 개선이나 주가 부양만을 노리고 실행될 경우, 이는 단순히 CEO의 스톡옵션 가치를 불려주는 도구로 전락한다. 장부상 이익은 늘고, 주가는 단기적으로 반짝이지만, 그 돈이 원래 들어갔어야 할 신사업, R&D, 인재 확보에 쓰이지 못하면서 미래의 경쟁력은 서서히 약해진다.
이런 행태는 자사주 매입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EPS를 맞추기 위해 무리한 인수합병을 진행하거나, 단기적으로 비용 절감 효과를 내기 위해 연구개발을 축소하고 브랜드 마케팅을 줄이는 것도 같은 범주다. 심지어 직원 교육이나 공급망 강화 같은 장기적 투자도 ‘즉각적인 숫자 개선에 기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잘린다. 공통점은 모두 당장의 재무제표는 개선되지만, 기업의 장기 가치는 손상된다는 점이다.
5. 마무리
물론 모든 재무쟁이 CEO가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위기 관리나 재무 안정성을 확보하는 데 강점을 발휘하기도 한다. 문제는 그 CEO가 단순히 숫자에 집착하는 인물인지, 아니면 재무적 관점을 기업의 성장 전략과 균형 있게 엮을 수 있는 인물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흔히 말하는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처럼, 겉으로 드러난 성향만으로는 그 차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게다가 역사적으로 돌아봐도, 재무쟁이 CEO가 장기적으로 기업을 크게 성장시킨 사례는 많지 않았다. 단기 실적을 관리하는 데는 유능했을지 몰라도, 그 이후의 성장 동력을 키우지 못해 결국 경쟁에서 밀려난 경우가 훨씬 많았다. 그래서 나는 재무쟁이 CEO가 이끄는 기업에는 투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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