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 스티브 미란이 작성한 ‘글로벌 무역 시스템 재구성을 위한 사용자 가이드’(미란 보고서)를 색다른 관점으로 살펴보자.
1. 패권국의 불편한 진실
2024년 11월, 미국 재무부 전직 관료인 스티븐 미란(Stephen Miran)이 발표한 보고서가 국제 정책 전문가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제목은 ‘글로벌 무역 시스템 재구성을 위한 사용자 가이드(A User’s Guide to Restructuring the Global Trading System)’. 표지부터 평범해 보이는 이 보고서는 사실상 미국 패권 유지의 비상 매뉴얼에 가깝다.
보고서의 핵심 메시지는 이 한 문장에 집약된다. ‘세계 패권국이자 기축통화국으로서 누리는 장점은 유지하되, 그로 인해 발생하는 구조적 부담은 다른 나라들과 나누겠다.’ 이 보고서는 오늘날의 경제 질서를 구성하는 불편한 진실, 즉 미국이 그동안 혼자 짊어져 온 트리핀의 딜레마를 새롭게 해석하고, 이를 우회하기 위한 전략을 제시한다.
2. 트리핀의 딜레마
1960년대 초반, 벨기에 출신 경제학자 로버트 트리핀(Robert Triffin)은 미국 의회에서 증언하며 다음과 같은 역설을 제기했다. ‘기축통화를 공급하는 국가는 세계 유동성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무역수지 적자를 지속할 수밖에 없지만, 그러한 적자가 누적되면 기축통화에 대한 신뢰가 붕괴될 것이다.’
그의 주장은 브레튼우즈 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것이었고, 나중에는 ‘트리핀의 딜레마’로 명명되며 국제금융 질서의 본질적 모순으로 기록되었다. 실제로 1971년 닉슨 대통령이 금 태환 정지(금본위제 종료)를 선언하며 브레튼우즈 체제가 무너진 것도, 이 딜레마의 예고된 결과였다.
오늘날, 50여 년이 지난 지금 미국은 여전히 무역수지와 재정수지 모두에서 막대한 적자를 지속하고 있으며, 그 대신 달러는 전 세계 경제와 투자에서 중심 통화로 남아 있다. 미란 보고서는 이 상태가 더 이상 지속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서 출발한다.
3. 스티브 미란의 제안
미란 보고서에서 제시하는 핵심 전략은 다음과 같다: 1) 동맹국들이 보유 중인 미국 국채를 100년 만기 무이자 채권으로 전환하고, 2) 그 대가로 미국은 안보 보장, 기술 공유, 자국 시장 접근성 등 비경제적 혜택을 제공한다. 즉, 미국은 재정 부담을 줄이는 동시에 패권을 유지하려는 새로운 거래 구조를 창안한 셈이다.
이른바 ‘마러라고 합의(Mar-a-Lago Accord)’라 불리는 이 구상은, 기존의 국제질서가 미국 중심으로 유지된다는 전제하에, 동맹국들이 일정 수준의 경제적 희생을 감수하도록 유도하는 외교·경제적 레버리지 전략이다.
이 전략은 성공하면 미국의 기축통화 지위와 패권의 수명을 수십 년 연장할 수 있지만, 실패하면 국제사회에서 달러 신뢰를 급격히 잃고 글로벌 금융 질서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
4. 왜 지금인가?
미란 보고서가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이론적인 제안이기 때문이 아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 수 있기 때문이다. 2023년 기준, 미국의 최종 소비 지출은 약 22.5조 달러로 전 세계에서 단일 국가 기준으로는 가장 크다.
그러나 상황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2023년 기준, 중국의 최종 소비 지출은 약 10조 달러에 달하며, 3~4선 도시 중심의 소비 증가와 내수 확대 정책으로 인해, 중국은 이미 ‘생산 중심 경제’에서 ‘소비 주도 경제’로 전환 중이다.
2023년 인도의 민간 소비 규모는 2.5조 달러, 10년 만에 거의 두 배로 성장했다. 골드만삭스는 인도가 2030년경 세계 3위의 소비 대국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중산층의 확장과 디지털 결제 시스템의 보급이 주요 요인이다.
베트남, 인도네시아, 브라질 등은 연 6~8%대 소비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소득 상승과 스마트폰 보급, 금융 접근성 향상이 주요 배경이다. 이처럼 미국의 소비 지위는 점차 상대적으로 축소되고 있으며, 새로운 소비 블록이 형성되고 있다. 이러한 ‘소비의 다극화’는 기축통화 질서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5. 소비축의 변화와 금융 시스템
현대 금융 시스템은 단지 생산력이나 무역 흑자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진정한 힘은 ‘누가 소비하느냐’, 다시 말해 자본의 최종 종착지가 어디냐에 달려 있다.
히말라야 캐피탈의 창립자 리루(Li Lu)는 ‘중국이 진정한 강국이 되기 위해선 저축을 소비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단순한 경제 조언이 아니라, 패권 구조를 바꾸는 전략적 제안이기도 하다.
만약 중국과 인도가 미국을 넘어서는 소비 국가로 자리 잡는다면, 달러에 집중된 자본 흐름은 변화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미국은 미란 보고서와 같은 전략적 수단을 활용해, 소비 축이 넘어가기 전에 시간을 벌어야 한다. 지금이 아니면, 미국은 소비의 헤게모니를 다른 국가에 내주고 기축통화 지위를 방어할 도구마저 잃게 될 가능성이 높다.
6. 정치가 아닌 구조의 문제
미란 보고서는 겉으로는 무역 재설계에 관한 기술적인 정책 문건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패권 구조의 균열에 대한 경고장이다. 이 보고서를 단지 미국의 이익 극대화 수단으로 본다면, 절반만 이해한 것이다.
트리핀의 딜레마는 더 이상 과거의 예언이 아니다. 미국은 이 딜레마의 임계점에 도달해 있다. 그 해결책이 ‘마러라고 합의’든, 다른 형태든, 핵심은 미국 혼자서는 패권을 유지할 수 없다는 구조적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지금이 이 전략을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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