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효율의 시대를 지나, 존속과 선택의 시대로 이동하고 있다.
1. 통화정책과 재정정책
최근의 거시 환경을 설명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변화는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이 같은 방향을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리면 정부도 재정 지출을 줄이는 방식으로 총수요를 관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금융 안정성을 유지하는 것이 정책 조합의 핵심 목표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다르다. 중앙은행은 여전히 물가와 금융 시스템의 신뢰를 지키기 위해 중립 금리를 중심으로 움직이려 한다. 인플레이션을 방치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경기와 금융을 강하게 눌러버릴 수도 없는 상황에서 중립이라는 개념은 일종의 균형점이 된다. 반면 정부의 재정정책은 축소되기보다는 확대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단기 경기 부양이 아니라 산업, 안보, 공급망, 에너지, 인프라 같은 구조적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조합은 일시적인 정책 엇박자라기보다는 역할 분담에 가깝다. 통화정책은 인플레이션 기대와 금융 질서를 관리하고, 재정정책은 국가가 포기할 수 없는 영역을 떠받치는 역할을 맡는다. 부채를 줄이는 문제 역시 상환의 문제가 아니라 관리의 문제로 바뀌었다. 성장과 명목 확장을 통해 부채 비율을 조정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물가 압력은 중립 금리로 관리하려는 선택이다. 완벽한 해법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가장 덜 고통스러운 경로에 가깝다.
2. 보호무역과 다극화
이러한 정책 조합은 세계화에서 다극화로 이동하는 흐름과 깊게 연결돼 있다. 과거의 세계화 국면에서는 효율과 비교우위가 거의 모든 판단의 기준이었다. 생산비가 낮은 지역으로 공장이 이동하고, 자본은 수익성이 높은 곳을 찾아 자유롭게 이동했다. 보호무역은 예외적인 선택이었고, 다극화는 불안정한 상태로 인식됐다.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글로벌 공급망은 더 이상 단순한 비용 최소화의 문제가 아니라 안정성과 통제 가능성의 문제가 되었다. 반도체, 에너지, 방산, 원자재 가공 같은 산업은 평시 기준으로는 비효율적이더라도 위기 상황에서 반드시 작동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관세, 보조금, 수입 규제, 자국 우선 정책 같은 보호무역적 수단이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보호무역과 다극화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미국 패권 이전의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의 시기에도 국가별 블록과 전략적 개방은 공존했다. 오히려 전후 미국 중심의 자유무역 질서가 예외에 가까웠다. 지금은 그 예외 상태에서 벗어나 역사적 평균에 가까운 질서로 되돌아가는 과정에 있다.
3. 비교우위와 외교
다극화 환경에서는 모든 산업을 자국 내에서 해결할 수 없다. 아무리 재정을 투입해도 시간, 지질, 기술 축적의 문제로 대체가 불가능한 영역은 남는다. 첨단 반도체 장비, 특정 소재, 에너지 자원, 군사 기술 같은 것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지점에서 비교우위는 단순한 경제 개념을 넘어 외교의 문제로 확장된다. 특정 기술이나 자원을 보유한 국가와의 관계는 산업 포트폴리오의 일부가 된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면 가격이 오르는 수준을 넘어 접근 자체가 제한될 수 있다. 그래서 외교는 선언이나 명분의 문제가 아니라 공급망과 기술 접근권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 된다.
과거 세계화 시기에는 시장이 외교의 부담을 상당 부분 흡수해줬다. 지금은 반대다. 외교적 신뢰가 없으면 민간 기업 간 거래조차 어려워진다. 이 변화는 투자 환경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특정 산업의 수익성은 기술 경쟁력뿐 아니라 국가 간 관계에 의해 좌우될 가능성이 커졌다.
4. 가속화 그리고 판단
국가와 민간 자본이 결합하면서 변화의 속도는 빨라지고 있다. 맨해튼 프로젝트 이후 원자력과 컴퓨팅이 급격히 발전했던 것처럼, 지금도 AI, 에너지, 방산, 인프라 분야에서 자본과 정책이 동시에 투입되고 있다. 이 가속화는 기술적 진보뿐 아니라 산업 구조 전반을 재편한다.
이 환경에서 중요한 점은 도구가 아니라 판단이다. 데이터와 정보는 넘쳐나지만, 과거의 관계식은 더 이상 안정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금리, 성장, 물가, 재정, 외교가 서로 얽히며 동시에 변수로 움직인다. 과거 평균이나 단순한 회귀 분석만으로는 방향을 잡기 어렵다.
결국 개인에게 남는 것은 판단의 문제다. 다양한 정보를 접하고, 편향을 경계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을 내려야 한다. 불확실성을 제거하려 하기보다는 불확실성을 전제로 의사결정을 내리는 능력이 중요해진다. 이 과정 자체를 즐기지 못한다면 지금의 환경은 상당히 고통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5. 초과수익
이런 환경에서 초과수익이 발생할 수 있는 경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끝까지 살아남아 이익을 독점할 수 있는 첨단산업 기업이다. 기술 난이도, 규모의 경제, 네트워크 효과, 규제 장벽이 결합해 경쟁자가 탈락한 뒤에야 수익성이 정상화되는 구조다. 이 경우 초과수익의 핵심은 기업 선택이며, 예측 난이도는 매우 높다.
다른 하나는 마진이 얕고 사양 산업처럼 보이지만 장기간 존속할 수밖에 없는 국가기간산업이다. 철강, 에너지, 전력, 인프라 같은 산업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산업들은 고성장을 기대하기 어렵지만 사라질 가능성도 낮다. 국가가 개입하고, 수요가 구조적으로 유지되며, 비효율이 일정 부분 용인된다.
이 두 번째 경로에서 초과수익은 성장이 아니라 재평가에서 나온다. 사람들이 매력 없다고 판단해 가치 대비 낮은 가격을 부여해둔 상태에서 존속성이 다시 인식될 때 밸류에이션의 바닥이 위로 이동한다. 이 과정은 빠르지 않지만, 상대적으로 예측 가능하다.
6. 집중에서 분산으로
과거 10년은 집중 투자가 합리적인 시대였다. 저금리, 유동성 확대, 세계화 환경에서는 승자가 비교적 명확했고, 맞았을 때의 보상이 컸다. 하지만 앞으로의 10년은 구조가 다르다. 정책 변수와 외생 리스크가 늘어나면서 하나의 기업, 하나의 시나리오에 베팅하는 위험이 커졌다.
이 환경에서는 손익비가 괜찮은 기업을 여러 개 묶어가는 전략이 더 합리적일 수 있다. 무작위 분산이 아니라 구조적 분산이다. 각 기업은 단독으로도 하방이 제한돼 있고, 서로 다른 정책과 수요에 노출돼 있으며, 일부는 사이클이나 정책 변화로 크게 튈 가능성을 가진다.
집중에서 분산으로의 전환은 보수화라기보다 환경 변화에 대한 대응이다. 미래를 정확히 맞히는 능력보다 틀렸을 때 버틸 수 있는 구조가 중요해졌다. 시간은 모든 투자자에게 동일하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편이 되어주는 전략의 가치가 커진다.
7. 마무리
지금의 세계는 단순하지 않다. 통화와 재정은 각자의 논리로 움직이고, 보호무역과 다극화는 기본값이 되었으며, 비교우위는 외교와 분리되지 않는다. 변화는 빠르고, 예측은 어렵다. 하지만 이 환경은 동시에 판단의 가치를 다시 드러내는 시대이기도 하다.
초과수익은 미래를 정확히 맞혀서가 아니라, 사라지지 않을 것을 너무 싸게 파는 오류를 인내심 있게 기다릴 때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집중이 정답이었던 시대가 있었다면, 이제는 분산이 합리적인 시대가 오고 있다. 결국 투자에서 남는 것은 수익률보다 선택의 일관성과 판단의 질일지도 모른다.
PS – 흥미로운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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