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류업보다 구조조정이 먼저다

한국 증시의 저평가는 단순한 시장의 오판이 아니라 산업·자본 구조의 문제다. 구조조정과 자본 효율 개선 없이는 밸류업은 버블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1. 한국 증시 저평가 담론의 전제 문제

한국 증시가 늘 저평가되어 있다는 인식은 외환위기 이후 여러 차례 반복되었지만, 이 주장은 기본적으로 한국 기업들이 적정가치 대비 싸게 거래되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문제는 이 적정가치가 단순히 시장의 기분이나 외국인 자금 유입만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미래 현금흐름과 자본 효율성이라는 실체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다.

한국 상장사의 평균적인 ROIC는 여전히 글로벌 평균보다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설비투자 비중이 높고, 자본집약적인 산업에 많이 노출되어 있으며, 그 결과로 투자 대비 수익률이 낮아지는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배당 성향을 높이거나 자사주를 매입하는 것만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본질적으로 이익이 성장하고 자본 효율성이 높아져야 주가가 오를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일시적 랠리 후 다시 하락하는 패턴이 반복될 것이다.

지정학 리스크는 한국 시장이 부여받는 리스크 프리미엄의 중요한 부분이다. 북한 리스크와 미중 갈등의 최전선이라는 지정학적 위치, 중국 경기 변동에 대한 높은 민감도는 단순한 투자 심리 요인이 아니라 실제 할인율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동한다. 즉, 같은 수준의 현금흐름이라도 한국 기업에 더 높은 할인율이 적용되기 때문에 밸류에이션은 구조적으로 낮게 형성된다.

산업 구조의 질적 특성도 무시할 수 없다. 글로벌 브랜드와 가격결정력을 갖춘 기업은 삼성전자, LG화학, 현대차 등 일부에 한정되어 있고, 다수 상장사는 B2B 위주, 경기순환 산업 중심으로 묶여 있다. 이러한 산업 포트폴리오는 고정비 부담이 크고 경기 변동에 취약해 ROE 변동성이 높다. 글로벌 투자자 입장에서는 이러한 변동성을 추가 리스크로 보고 할인율을 더 높게 적용할 수밖에 없다.

자본 구조 또한 문제다. 상당수 기업이 순차입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부채비율이 높아 금융비용 부담이 크다. 이는 경기 둔화 시 이익이 급격히 줄어드는 구조를 만들고, 시장은 이 같은 위험을 가격에 반영한다. 따라서 한국 증시의 낮은 PBR과 PER은 단순한 시장의 오판이라기보다는 이러한 구조적 위험 요인을 반영한 결과로 보는 편이 현실적이다.

2. 상법 개정과 밸류업 정책

상법 개정은 한국 자본시장이 선진 시장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다. 집중투표제, 전자투표제, 감사위원 분리 선출 같은 제도는 오너 중심 지배구조에서 소수주주의 권리 보호를 강화하고, 이사회와 경영진의 의사결정을 보다 투명하게 만든다. 주주평등 원칙이 법적으로 보장될수록 자본시장 참여자들은 의사결정 과정의 정당성을 신뢰할 수 있고, 그 결과로 시장 할인 요인 중 일부는 줄어든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 개혁이 곧바로 장기적 리레이팅으로 이어지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법적 권한의 강화가 기업의 현금흐름이나 자본 효율성을 자동으로 높여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의 사례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도쿄증권거래소(TSE)가 프라임 시장 상장사들에 대해 PBR 1배 이상 달성을 요구한 것은 2023년이지만, 그에 앞서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산업 구조조정과 금융 시스템 정상화가 진행되었다. 1990년대 버블 붕괴 후 일본은 장기간의 디플레이션과 좀비기업 문제를 겪었다. 정부와 금융기관은 부실채권을 정리하고, 회생 가능성이 없는 기업을 퇴출시키거나 합병을 통해 재편시켰다. 산업재생기구(IRCJ) 같은 공적 플랫폼이 채무조정과 스폰서 매각을 지원해 자원의 재배분이 이루어졌고, 결과적으로 산업 전체의 생산성이 개선되었다. 그 기반 위에서 스튜어드십 코드, 거버넌스 코드가 도입되고, 기업들은 ROE와 자본비용을 경영의 핵심 지표로 삼게 되었다. 이후 거래소의 밸류업 압박은 이미 개선된 체질 위에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한국은 이 과정에서 일본과 차이가 있다. 전통적 제조업 부문에서 저부가가치 사업의 비중이 여전히 크고, 글로벌 경쟁력을 상실했거나 공급과잉 상태인 분야도 많다. 그러나 퇴출과 통폐합은 지연되고 있다. 정부는 고용 충격을 우려하고, 기업은 정치적·사회적 반발을 고려해 결정을 미루는 경우가 많다. 이로 인해 자본이 수익성이 낮은 부문에 묶이고, 전체 경제의 자본 효율성이 개선되지 못한다.

이런 조건에서 상법 개정과 배당 확대, 자사주 매입 같은 주주친화 정책만으로 주가를 올리려 하면, 실질 성장 없이 밸류에이션이 먼저 상승해 일종의 버블이 형성될 가능성이 커진다. ROE가 오르지 않은 상태에서 배당 성향만 높이면 자본잠식 속도가 빨라질 수 있고, 장기적으로 기업의 투자 여력이 줄어들면서 경쟁력이 더 약화될 수도 있다. 밸류업의 핵심은 주가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구조적 수익성과 자본 효율성을 높여 그 결과로 시장에서 적정가치를 인정받도록 만드는 데 있다.

따라서 제도 개혁은 필요조건이지만, 산업 구조조정과 병행될 때 비로소 충분조건이 된다. 부실과 저수익 부문이 정리되고, 생산성이 높은 산업으로 자본이 이동해야 지배구조 개혁의 효과가 배가된다. 그렇게 해야 상법 개정이 단순한 권리 강화 이상의 결과로 이어지고, 밸류업이 버블이 아닌 지속 가능한 리레이팅으로 작동할 수 있다.

3. 산업 구조조정의 선행 필요성

밸류업 정책이 단기적인 주가 부양책에 그치지 않고 지속 가능한 리레이팅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산업 구조조정이 가장 먼저 진행되어야 한다. 산업 포트폴리오의 질적 전환은 필수적이다. 한국 제조업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범용 제품 중심의 저부가 산업에 머물러 있다. 석유화학 부문만 보더라도 범용 에틸렌·폴리에틸렌 제품의 공급과잉과 마진 악화가 장기화되고 있다. 이러한 산업은 중국, 중동과 같은 저원가 경쟁자에 의해 지속적으로 압박받기 때문에, 범용 생산 설비를 유지한 채로는 자본 생산성을 끌어올리기 어렵다. 스페셜티 케미칼, 바이오 기반 소재, 전지용 전해액·분리막 같은 고부가 제품으로 제품 믹스를 전환해야 한다. 철강업도 비슷한 과제를 안고 있다. 범용 열연·냉연 제품보다 전기차용 초고장력강, 친환경 강재, 수소환원제철 기술 등 고급화 영역으로 이동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자본 배분의 재편 역시 산업 전환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다수의 한국 기업들은 여전히 대규모 CAPEX를 계획하지만, 투자 수익률 검증이 미흡한 경우가 많다. 비핵심 자산의 매각, 불필요한 CAPEX의 축소, 전략적 M&A를 통한 규모의 경제 확보가 병행되어야 자본 효율성이 높아진다. 투자자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절대적인 투자 규모가 아니라 투자한 자본이 얼마만큼의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하느냐이기 때문에, ROIC를 상회하지 못하는 설비투자와 프로젝트는 과감히 조정해야 한다.

노동시장과 규제 환경의 개선도 필요하다. 구조조정이 원활히 이루어지려면 고용 이동이 가능한 생태계가 전제되어야 한다. 현재처럼 해고와 재배치가 사회적 갈등으로 번지고, 규제 장벽으로 인해 퇴출이 지연되는 구조에서는 비효율 기업이 장기간 존속하게 되고, 산업 평균 수익성이 끌어내려진다. 결국 건강한 기업에도 자본 비용이 높게 적용되고, 시장 전체가 낮은 PBR과 PER로 거래되는 구조가 반복된다.

4. 마무리

한국 증시의 저평가는 단순히 시장 참여자의 무관심이나 단기적인 심리 탓으로 보기 어렵다. 구조적 리스크 프리미엄이 존재하며, 이를 낮추려면 산업 고도화와 자본 효율 개선이 선행되어야 한다. 상법 개정과 밸류업 프로그램은 필요하지만 충분조건이 아니다.

구조조정, 산업 재편, 자본 배분의 효율화가 함께 이루어져야만 밸류업이 장기적 성과를 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단기 외국인 자금 유입으로 주가가 오르고, 이익과 생산성이 개선되지 않은 상태에서 밸류에이션이 다시 하락하는 버블-붕괴 사이클을 반복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이 일본보다 먼저 상법 개정을 추진하는 것은 방향성 측면에서는 옳지만, 산업 포트폴리오 정리와 기업의 근본적 경쟁력 강화가 병행되지 않는다면 밸류업은 주가만 높이는 일회성 이벤트에 그칠 위험이 있다.

PS – 선제적 산업 구조조정이 될 확률은 매우 낮다고 본다. 발등에 불똥 떨어질 때쯤 되서야 시작될 것이라 예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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