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저민 프랭클린은 왜 존경받는가?

벤저민 프랭클린은 미국 역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는 건국의 아버지들 중 유일하게 미국 독립의 기초가 된 네 가지 핵심 문서, 즉 독립선언서, 프랑스와의 동맹 조약, 영국과의 파리 평화 조약, 그리고 미국 헌법에 모두 서명한 인물이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깊은 존경을 받는 이유는 단지 정치적인 업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인쇄업자, 과학자, 발명가, 외교관, 저술가, 그리고 사회 사업가로서 다방면에서 인류 사회에 기여했다. 프랭클린의 삶은 개인의 지적 호기심과 성취가 어떻게 공공의 이익과 결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꼽힌다.

그의 생애를 관통하는 핵심 가치는 실용주의와 공공성이다. 1706년 보스턴의 가난한 양초 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프랭클린은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 형의 인쇄소에서 견습공으로 일하며 스스로 글쓰기와 학문을 익혔고, 이후 필라델피아로 이주하여 자립했다. 그는 뛰어난 사업적 수완과 철저한 자기 관리를 바탕으로 젊은 나이에 경제적 자유를 확립했다. 그러나 부를 쌓는 데 안주하지 않고, 자신이 확보한 시간과 자원을 사회 시스템을 개선하고 인류의 지식을 확장하는 데 아낌없이 투자했다. 이러한 면모가 그를 시대를 초월한 존경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프랭클린이 대중에게 널리 인정받는 첫 번째 배경은 과학과 발명 분야에서 남긴 혁신적인 성과다. 그는 18세기 서구 과학계에서 전기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선구자였다. 당시 전기는 마술이나 신기한 현상 정도로 취급받았으나, 프랭클린은 실험을 통해 전기가 플러스와 마이너스라는 두 가지 전하를 가지고 있으며, 보존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연을 날려 번개가 전기 현상임을 증명한 실험은 그의 대담함과 과학적 탐구열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다. 이 연구를 바탕으로 그는 피뢰침을 발명하여 수많은 인명과 재산을 화재의 위험으로부터 구했다.

그의 발명은 피뢰침에 머물지 않았다. 열효율을 획기적으로 높인 프랭클린 난로, 원근 양용 안경, 주행거리계, 선박의 수밀 격벽 등 일상생활의 불편함을 해소하는 다양한 물건을 만들어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프랭클린이 자신의 발명품에 대해 단 한 건의 특허도 신청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의 발명으로 우리가 많은 편의를 누리고 있으므로, 자신 역시 발명을 통해 타인에게 봉사하고 이를 무상으로 공유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기술을 독점하여 개인의 이익을 취하기보다 공공의 복지를 우선시한 그의 철학은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회를 이롭게 하려는 프랭클린의 실용주의적 태도는 필라델피아의 도시 인프라 구축과 사회 제도 마련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사회적 문제를 시민들의 자발적인 연대와 협력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미국 최초의 유료 대출 도서관인 필라델피아 도서관 회사다. 당시 책은 유통량이 적고 가격이 비싸 일반 시민들이 접근하기 어려웠는데, 프랭클린은 회원들이 자금을 모아 공동으로 책을 구매하고 대여하는 시스템을 고안하여 지식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이외에도 미국 최초의 자원봉사 소방대인 유니언 소방차 회사를 설립하여 화재 방제 시스템을 정비했고,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야간 파수꾼 제도를 개선했다. 가난한 이들이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펜실베이니아 병원 설립을 주도했으며, 펜실베이니아 아카데미를 세워 이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로 발전하는 고등 교육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미국 철학 학회를 창립하여 학문적 교류의 장을 넓혔고, 부체신장관으로서 우편 마차 경로를 재정비하고 야간 운송을 도입해 우편 배달 시간을 절반으로 줄이는 혁신을 이뤄냈다. 그가 구축한 이 모든 제도는 철저히 효율성과 공익성에 기반하고 있었으며, 현대 사회 시스템의 원형이 되었다.

정치적, 외교적 영역에서 프랭클린이 발휘한 역량은 미국이라는 국가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펜실베이니아 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정계에 발을 들인 그는 영국의 과도한 과세와 식민지 압박에 맞서 식민지의 이익을 대변했다. 특히 인지세법 철회를 요구하기 위해 영국 의회 청문회에 서서 식민지 주민들의 입장을 명확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법안 철회를 이끌어낸 사건은 그의 정치적 명성을 국제적으로 높였다. 영국과의 타협이 불가능해지자  과감하게 독립의 길을 선택했고, 독립선언서 기초 위원으로서 토머스 제퍼슨의 글을 수정하며 문장을 가다듬었다.

독립 전쟁 발발 후 프랭클린의 진가는 외교 무대에서 가장 눈부시게 발휘되었다. 70세의 고령의 나이에 프랑스 대사로 파견된 프랭클린은 특유의 소박한 의복과 온화한 성품, 뛰어난 위트로 프랑스 사교계와 정계를 사로잡았다. 당시 강력한 절대왕정 국가였던 프랑스가 공화정을 지향하는 미국의 독립을 지원하도록 설득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과제였다. 그러나 외교적 공세를 서두르지 않고 프랑스 여론을 아군으로 만들며 차분히 기회를 기다렸다. 결국 새라토가 전투의 승리 소식이 전해지자 이를 놓치지 않고 프랑스와의 군사 동맹과 재정 지원 계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프랑스의 원조가 없었다면 미국의 독립 전쟁 승리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프랭클린의 외교적 성과는 미국의 운명을 바꾼 결정적 계기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헌신은 멈추지 않았다. 1787년 헌법 제정 의회에 참석한 프랭클린은 당시 최고령 대표였다. 의회는 각 주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며 와해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특히 인구가 많은 대주와 인구가 적은 소주의 의석수 산정 문제를 두고 갈등이 깊었을 때, 프랭클린은 상원은 주별로 동등하게 의석을 배분하고 하원은 인구 비례로 배분하는 이른바 ‘위대한 타협’을 도출하는 데 막후 조정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갈등이 극에 달할 때마다 소통과 양보를 강조하며 회의장 분위기를 가라앉혔고, 마침내 인류 최초의 성문 헌법이 탄생하는 데 기여했다.

그가 인간적으로도 깊은 존경을 받는 이유는 철저한 자기 성찰과 도덕적 완성을 향한 끊임없는 노력 때문이다. 20대 시절에 이미 자신의 삶을 이끌어갈 13가지 덕목을 정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매일 기록을 남겼다. 절제, 침묵, 질서, 결단, 절약, 근면, 진실, 정의, 중용, 청결, 침착, 순결, 겸손으로 이루어진 이 덕목들은 단순한 성공을 넘어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스스로에게 부과한 규율이었다. 자신이 이 덕목들을 완벽하게 지키지 못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노력을 지속하는 과정 자체에서 스스로가 더 나은 사람이 되었고 행복을 느꼈다고 기록했다. 이러한 정직한 자기 성찰은 세대를 넘어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저술 활동 역시 공익적 가치와 맞닿아 있다. 매년 발행했던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은 일상적인 정보뿐만 아니라 근면과 절약을 강조하는 수많은 격언을 담아 식민지 주민들의 삶에 실질적인 지침서 역할을 했다. 사후에 출간한 ‘자서전’은 무일푼으로 시작해 자수성가한 한 인간의 기록을 넘어, 공공을 위해 헌신하는 시민의 전형을 제시한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프랭클린의 글은 화려한 수식어 없이 평이하고 명료하여 누구나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었으며, 이는 대중의 의식을 고양하는 데 기여했다.

말년에 이르러 프랭클린은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사회적 실천을 이어갔다. 과거에 노예를 소유한 적이 있었으나, 노예 제도의 모순과 비인도성을 깨닫고 점진적으로 노예 해방 운동에 동참했다. 펜실베이니아 노예해방협회의 회장직을 맡았으며, 미국 의회에 노예 무역의 금지와 노예 제도 폐지를 촉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사회의 부정의를 바로잡고 인권을 신장하기 위해 노력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삶은 다방면의 재능이 한 인간에게 어떻게 조화롭게 융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뛰어난 지성을 가졌으나 오만하지 않았고, 막대한 부를 쌓을 기회가 있었으나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이를 포기했다. 높은 관직에 올랐으나 늘 시민의 눈높이에서 소통했으며,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순간에도 양보와 타협의 미덕을 잃지 않았다. 그가 남긴 수많은 제도와 과학적 업적은 현대 사회의 기반이 되었고, 공공을 향한 그의 이타적인 헌신과 도덕적 성찰은 오늘날에도 전 세계 사람들에게 깊은 귀감이 되고 있다. 이처럼 삶의 모든 영역에서 타인의 삶을 개선하고자 했던 실천적 태도야말로 벤저민 프랭클린이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하나로 자리 잡은 이유다.

PS – 찰리 멍거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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