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여러 담론 중에서도 세대 간의 고통을 비교하며 누가 더 힘든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가리는 일명 고난의 올림픽은 가장 소모적이면서도 무의미한 논쟁에 속한다. 월스트리트 저널을 비롯한 세계적인 매체들이 이를 기사 거리로 다루고 있을 만큼 이 갈등의 양상은 전 지구적인 현상으로 번졌지만, 정작 그 논쟁의 끝에는 어떠한 생산적인 합의나 해결책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각 세대가 서로를 향해 냉소의 화살을 날리며 자신의 고통이 더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연대는 파편화되고 갈등의 골만 깊어진다. 고통이라는 주관적인 감각을 수치화하여 순위를 매기려는 시도 자체가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음을 간과한 채, 대중은 이 자극적인 프레임에 쉽사리 매몰되곤 한다.
이러한 논쟁이 무의미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각 세대가 짊어진 삶의 무게가 그 결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과거 세대가 겪었던 고통이 절대적 빈곤과 물리적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면, 현대 세대가 마주한 고통은 고도화된 경쟁 체제와 심리적 고립, 그리고 기회의 상실이라는 구조적 경직성에서 기인한다. 굶주림을 해결해야 했던 시대의 고통과 자아실현의 문턱이 높아진 시대의 좌절을 일대일 선상에 올려두고 비교하는 행위는 사막에서 갈증을 느끼는 이와 깊은 바다 한가운데서 숨이 막히는 이 중 누가 더 고통스러운지를 따지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다. 짐의 성격이 아예 다르기 때문에 이를 동일한 잣대로 측정하려는 시도는 시작부터 오류를 내포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디어가 이러한 논쟁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배경에는 갈등이 가장 강력한 수익 모델이 된다는 자본의 생리가 숨어 있다. 복잡한 사회 구조적 문제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일은 품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대중의 관심을 끌기도 어렵지만, 세대라는 가시적인 집단을 나누어 서로를 공격하게 만드는 방식은 즉각적인 반응을 끌어낸다. 사람들은 구조적 불평등이나 경제적 모순이라는 거대한 실체에 집중하기보다, 눈앞에 보이는 다른 세대를 비난하며 자신의 고통을 보상받으려 한다. 이 과정에서 각 세대가 직면한 고유한 시대적 결함들은 논의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오직 누가 더 불쌍한가라는 감정적 호소만이 남는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세대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회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고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나타난 필연적인 결과물로 해석할 수 있다.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풍요를 누리는 시대에 접어들면서 우리는 생존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상실했다. 과거에는 가난을 극복하거나 민주화를 이루는 것과 같은 강력한 구심점이 사회 구성원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했다면, 지금은 그러한 시대정신이 희미해진 상태다. 기술의 발달은 각 개인을 자신만의 관심사와 알고리즘 안에 가두었고, 사람들은 공통의 서사를 공유하기보다 각자의 파편화된 세계 안에서 서로를 비교하며 존재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구심점이 사라진 사회에서 에너지가 외부가 아닌 내부의 타인을 향하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인간 본성 속에 내재한 끊임없는 비교 성향 또한 이 논쟁을 부추기는 핵심 요인이다. 인간은 자신의 절대적인 상태보다 타인과의 상대적인 위치에서 더 큰 만족이나 불만을 느끼도록 진화해왔다. 공동의 적이나 명확한 지향점이 사라진 공백을 타인과의 비교가 채우게 되면서, 내가 짊어진 짐이 남의 것보다 무겁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자신의 삶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의 노력을 끈기 부족으로 치부하며 자신의 과거를 영웅화하고,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의 성공을 시대적 운으로 돌리며 자신의 좌절을 합리화한다. 이 평행선 같은 주장이 반복되는 동안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은 좁아지고 냉소의 벽은 높아질 뿐이다.
물질적 풍요와 기술적 진보가 가져온 이 역설적인 상황은 우리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과거에는 결핍이 고통의 주된 원인이었다면, 이제는 풍요 속에서 발생하는 의미의 상실과 관계의 단절이 새로운 고통의 원인이 되었다. 시대정신이라는 강력한 중력이 약해진 사회에서 각 세대는 서로 다른 좌표를 떠다니고 있으며, 그들 사이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이러한 파편화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고통의 무게를 재는 저울을 치우고, 각 세대가 짊어진 짐의 성격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서로가 짊어진 것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논의가 시작되어야 함에도, 현재의 담론은 여전히 누가 더 무거운 짐을 졌느냐는 초등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결국 세대 갈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이 고난의 올림픽은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본질적인 가치를 잃어버렸음을 방증하는 씁쓸한 지표다. 우리가 정말로 주목해야 할 지점은 고통의 서열이 아니라, 왜 이토록 많은 이들이 자신의 고통을 증명받고 싶어 하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결핍이다.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 주거의 불안정, 노후의 두려움, 그리고 극심한 경쟁 체제와 같은 실질적인 문제들은 세대를 가리지 않고 모든 세대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공통의 압박 요인들을 해결하기 위해 힘을 합치기보다는 서로의 짐을 가늠하며 시간을 허비한다. 짐을 덜어줄 방법을 찾기보다 상대방의 짐이 가볍다고 깎아내리는 방식으로는 그 누구의 삶도 나아질 수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파편화된 개인들을 다시 묶어줄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구심점이다. 그것은 과거와 같은 거창한 이데올로기일 필요는 없다. 최소한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잣대로 재단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합의, 그리고 서로 다른 시대적 배경에서 탄생한 각기 다른 고충을 경청하는 자세만으로도 무의미한 논쟁의 상당 부분을 해소할 수 있다. 기술이 우리를 갈라놓고 풍요가 우리를 비교의 늪에 빠뜨릴지라도, 우리가 공유하는 인간적인 한계와 각자의 삶에서 분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세대 갈등이라는 허상의 전쟁터에서 내려와 각자가 짊어진 짐의 실제 모습을 직시할 때, 비로소 고난의 올림픽이라는 이 기괴한 경기는 끝이 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물질적 결핍보다 정신적 구심점의 부재가 더 큰 위협으로 다가오는 시대다. 구심점이 얕아진 사회에서 나타나는 소음들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스스로 중심을 잡고 이 파편화된 흐름의 본질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세대 간의 싸움이 격렬해질수록 그 이면에서 미소 짓는 갈등의 수혜자들을 경계해야 하며, 비교라는 본성이 만들어낸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서로의 고통을 경쟁시키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고통이 지닌 고유한 맥락을 존중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소모적인 논쟁에서 벗어나 좀 더 생산적이고 인간적인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고 믿는다.
PS – 존중을 최우선 가치로 두는 사람은 몇이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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