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팟 시장의 한계와 LTA 복원 가능성

미국의 대구경 흑연전극 덤핑 제소를 볼 때 가장 먼저 짚어야 할 점은, 이것이 단순히 값싼 수입품을 막기 위한 가격 분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표면적으로는 중국과 인도 업체들의 저가 판매 여부가 쟁점처럼 보이지만, 실제 본질은 미국 내 전극봉 공급 기반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단기 원가 절감 논리에 따라 해외 저가 물량에 더 깊이 의존할 것인가에 가깝다. 철강협회가 장기 공급망 리스크를 근거로 관세 필요성을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제강사들이 공개적으로 강한 찬성이나 강한 반대를 드러내지 않은 것 역시 단순한 중립이라기보다,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고려한 전략적 태도에 가깝다. 단기적으로는 저가 수입 전극봉이 원가 절감에 유리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미국 내 생산 기반이 약화될수록 중국과 인도 업체에 협상 주도권을 넘겨주게 된다. 그렇다고 이를 공개적으로 강하게 긍정하기도 어렵다. 향후 전극봉 공급자와 장기 계약을 다시 논의해야 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수요자인 제강사가 스스로 절박함을 드러낼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겉으로는 중립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공급망 안정에 더 무게를 둔 태도로 보인다.

이 제소를 긍정적으로 보는 근거는 단순히 정치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다. 중국과 인도 업체들은 시장 논리에 의한 가격 경쟁이라고 주장하겠지만, 앞선 브라질 사례를 보면 중국과 인도산 전극봉에 덤핑 마진이 존재한다는 방향의 판단이 이미 제기된 바 있다. 국가가 다르고 조사 제도가 다르다고 해도, 유사한 제품에서 같은 문제가 제기된다는 사실은 가격 왜곡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시사한다. 물론, 3월 12일 미국은 배터리 음극재 덤핑 제소를 기각한 전례가 있다. 다만 이 사안이 기각된 핵심 배경 중 하나는 자국 내에서 보호해야 할 실질적 산업 기반이 약했기 때문이다. 전극봉은 다르다. 미국 내 플레이어가 존재하고, 그 산업이 실제로 피해를 입고 있다는 논리를 세울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번 전극봉 건은 제도의 취지와 법적 구조에 훨씬 더 부합하는 사건이다. 상무부가 법적 마지노선(20일)에 맞춰 조사 절차를 개시한 점 역시 제출 자료의 형식적 완성도와 논리적 타당성이 일정 수준 이상이라는 신호로 읽을 수 있다(40일까지 연장하는 사례가 꽤나 잦음). 사건이 아예 성립하지 못할 정도로 허술했다면 초기 단계부터 그렇게 움직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덤핑 제소가 승인되느냐 자체보다, 그 이후 시장 참여자들이 어떤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은가에 있다. 필자는 가장 핵심적인 변화 중 하나가 그래프테크 인터내셔널의 LTA일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2017년 전극봉 사이클 이후 시장은 극단적으로 타이트해졌고, 그 결과 다수의 장기 계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그 뒤 5년 동안 묶여 있던 계약들이 해소되면서 전극봉 시장은 다시 스팟 중심으로 이동했다. 수요자 입장에서는 장기 계약의 경직성에서 벗어나 더 낮은 가격에 유연하게 조달할 수 있게 되었고, 공급자 입장에서는 과거와 같은 높은 고정 마진을 누리기 어려워졌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시장이 더 합리적으로 변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전극봉은 일반 범용 소재가 아니다. 품질 인증이 필요하고, 공정상 대체가 쉽지 않으며, 공급 차질이 발생할 경우 제강사의 생산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스팟 비중 상승은 평상시에는 유리하지만, 수급이 조금만 흔들려도 불안정성이 급격히 확대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든다.

2) 현재 그래프테크의 재무 상태는 매우 좋지 않다. 채권 이자와 유지 자본 지출 부담으로 인해 현금이 빠르게 소모되고 있다. 올해 말이나 내년 상반기까지 업황이 회복되지 못한다면 존속 가능성 자체를 걱정하게 될만큼 나쁘다. 제강사 입장에선 미국 내에서 의미 있는 전극봉 공급축 하나가 무너지면 장기적 관점에서 전극봉 공급망 리스크를 떠안게 된다. 전극봉은 없으면 제강 공정이 멈추는 품목이고, 특히 UHP급 대구경 전극봉은 아무 업체나 즉시 대체할 수 있는 제품이 아니다. 이런 시장에서 미국 내 생산 기반이 추가로 약화되면, 수요자인 제강사는 단순히 싼 전극을 사는 것이 아니라 향후 조달 협상력 자체를 잃게 된다.

3) 여기에 중국 15차 5개년 계획으로 인한 중국 내 전기로 가동률 상승 가능성과 인도의 꾸준한 전기로 철강 수요 증가까지 겹친다. 이는 단순한 경기 반등형 수요가 아니라 구조적 수요 증가에 가깝다. 중국은 기존 전기로 설비의 활용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갈 가능성이 크고, 인도는 철강 내수 성장과 전기로 기반 수요 증가가 동시에 나타나는 시장이다. 두 나라는 서로 다른 경로를 통해 움직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전극봉 수요가 점진적이지만 지속적으로 늘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전극봉 시장이 폭발적 수요 증가가 있어야만 타이트해지는 시장이 아니라는 점이다. 공급 탄력성이 낮고, 품질 전환이 쉽지 않고, 전략 재고의 의미가 큰 시장에서는 점진적인 수요 증가만으로도 체감 수급은 빠르게 팽팽해질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제강사들이 일부 LTA 물량을 그래프테크에 다시 배분할 가능성을 높아 보인다. 이는 그래프테크를 돕기 위한 자선 행위가 아니라, 자신들의 조달 리스크를 관리하기 위한 행동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미국 내 공급 기반을 완전히 붕괴시키지 않기 위한 보험에 가깝다. 나아가 덤핑 제소가 없었다 하더라도 이 시장은 이미 구조적으로 타이트해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티어1 니들 코크스를 사용한 UHP급 대구경 전극봉은 본질적으로 공급이 무한정 늘어날 수 있는 상품이 아니다. 고품질 니들 코크스 자체가 제한적이고, 이를 안정적으로 전극봉으로 전환할 수 있는 생산자는 소수다. 공급이 제한적인데 장기 계약은 줄어들고 스팟 비중은 늘어난 상태라면, 겉으로는 가격이 낮아 보여도 구조는 오히려 취약해진다. 이런 시장에서는 가격이 아니라 가용 물량이 문제로 바뀌는 순간이 올 수 밖에 없다.

물론, 덤핑 관세 승인은 2017년을 100% 재현할 것이라고 단정하긴 어렵다. 다만 이미 타이트해질 조건들이 쌓이고 있던 시장에 정책 이벤트가 하나 더해질 경우, 시장 참여자들의 행동이 훨씬 빠르게 바뀔 수 있다.

PS – 필자는 이번 덤핑 제소가 승인될 확률은 90%가 넘는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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