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강도 높은 에너지 제재를 받아왔다. 그러나 미국과 이란의 전쟁이 발발하면서 예상과 다른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제재 기조가 유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영역에서는 사실상 공급이 시장에 유입되는 것이 용인되거나 제재 강도가 조정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시장은 미국과 이란의 전쟁으로 인해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면서 해협의 물동량을 근거로 석유 부족을 예견하고 있다. 그러나 물리적인 총량을 기준으로 보면 반드시 그렇게 단순하게 결론내리기 어렵다. 원유는 특정 한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자원이 아니며, 이미 전 세계적으로 상당한 생산 능력이 존재한다. 실제 시장에서 가격이 급등하는 이유 역시 절대적인 부족 때문이라기보다 공급 차질 가능성에 대한 불안이 반영되는 경우가 많다.
현재 세계 원유 생산 구조를 보면 공급원은 생각보다 다양하다. 미국은 셰일 혁명 이후 세계 최대 수준의 산유국으로 자리 잡았고, 캐나다 역시 오일샌드를 기반으로 상당한 생산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여기에 브라질의 해상 유전과 노르웨이의 북해 유전 역시 꾸준한 공급원 역할을 하고 있다. 즉, 특정 해협이 봉쇄된다 하더라도 전 세계 원유 생산 자체가 즉각적으로 사라지는 구조가 아니다.
또한 전략 비축유 역시 중요한 완충 장치다. 주요 소비국들은 비상 상황에 대비해 상당한 규모의 재고를 보유하고 있으며, 공급 충격이 발생할 경우 일정 기간 시장에 공급을 늘릴 수 있다. 이러한 구조는 단기적인 공급 차질이 발생하더라도 즉각적인 물리적 부족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렇다면 물리적인 원유량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왜 러시아 제재 완화가 등장하는 것일까? 왜 유가는 오르는 것인가? 현재 에너지 시장의 핵심 문제는 총량이 아니라 구성이다. 글로벌 정유 설비의 상당 부분은 중질 원유를 처리하는 방향에 맞춰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거 주요 산유국들이 공급하던 원유의 평균적인 성상이 상대적으로 무겁다. 정유사들은 잔사유를 추가로 분해해 디젤이나 항공유 같은 중간유분 생산을 늘릴 수 있도록 복잡한 설비에 투자해왔다. 이러한 설비는 단순 증류 설비보다 투자 비용이 높지만, 동일한 원유에서 더 많은 고부가 제품을 생산할 수 있기 때문에 경제성이 있었다.
문제는 최근 공급되는 원유의 성상이 과거와 달라졌다는 점이다. 셰일 혁명 이후 증가한 원유는 상대적으로 경질유 비중이 높다. 경질유는 휘발유 생산에는 유리하지만, 기존 정유 설비가 목표로 했던 생산 구조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산업 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연료는 휘발유뿐 아니라 디젤과 항공유이며, 특히 물류와 제조업에서 디젤 소비 비중은 매우 높다. 중질 원유 비중이 줄어들 경우 이러한 중간유분 공급이 상대적으로 타이트해질 수 있다.
러시아 제재가 완화된 이유는 이 지점과 연결된다. 러시아는 글로벌 시장에서 의미 있는 규모의 중질 및 중간 성상 원유를 공급하는 국가 중 하나다. 물론, 베네수엘라 역시 중질 원유 비중이 높은 국가지만, 제재와 투자 부족으로 생산 능력이 과거 대비 크게 감소한 상태다. 이러한 상황에서 특정 유형의 원유 공급이 동시에 줄어들 경우 정유 시스템이 필요로 하는 원유 조합이 무너질 수 있다.
정유 설비는 단기간에 구조를 바꾸기 어렵다. 철강 공장이 특정 원료에 맞춰 설계되는 것처럼 정유소 역시 처리 가능한 원유 범위가 존재한다. 물론 서로 다른 원유를 혼합하여 투입할 수는 있지만, 전체적인 효율은 설계 당시 가정한 원유 성상에 가까울수록 높아진다. 만약 중질 원유 공급이 줄어들면 일부 설비의 활용도가 낮아지고 생산되는 제품 구성 역시 달라질 수 있다. 이는 특정 제품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나아가 지난 수년간 환경 규제 강화와 투자 회수 불확실성으로 인해 신규 정유 설비 투자가 크게 늘어나지 못했다. 정유 산업은 장기 투자 산업이기 때문에 한 번 설비 투자가 줄어들면 공급 능력이 빠르게 증가하기 어렵다. 원유는 존재하지만 이를 연료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병목이 발생하면 가격 변동성이 확대될 수밖에 없다.
에너지 시장은 단순한 공급 부족 논리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가격은 물리적 부족뿐 아니라 시스템의 유연성과 병목에 의해 결정된다. 원유 총량만 보면 충분해 보이지만, 실제 산업이 필요로 하는 것은 특정 품질 조합의 안정적인 흐름이다. 정책 역시 이 현실을 완전히 무시하기는 어렵다.
PS – COTC 역시 석유화학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정제는 한동한 빠듯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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