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철강 산업의 전기로 전환과 핵심 원자재 공급망의 변화는 친환경 규제라는 제도적 압박과 실질적인 생산 생태계의 제약이 충돌하는 고차원적인 구조적 모순을 보여준다. 유럽연합은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배출권거래제 규제를 강화하고 탄소국경조정제도를 도입하며 역내 철강사들에게 고로 중심의 생산 체제를 전기로 체제로 전환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규제의 강도가 단계적으로 높아짐에 따라 철강사들은 장기적인 생존을 위해 조속히 공정 전환을 착수해야 하는 당위성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기업들이 보유한 재무적 기초체력, 역내 전방 산업의 구조적 장기 침체, 그리고 대구경 전극봉과 프리미엄 침상코크스로 연결되는 과점화된 원자재 가치 사슬의 물리적 한계는 이러한 거시적 로드맵의 현실성을 심각하게 위축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유럽 철강사들이 맞닥뜨린 가장 가혹한 걸림돌은 전기로 공정 전환과 운영에 수반되는 막대한 자금 조달 및 고비용 구조의 고착화이다. 고로 설비를 폐쇄하고 전기로를 신설하는 데는 천문학적인 자본 지출이 요구되지만, 현재 유럽 철강 업계는 오랜 기간 누적된 수익성 악화로 인해 이를 독자적으로 감당할 재무적 여력이 고갈된 상태이다. 지난 수년간 중국과 인도의 저가 철강재가 글로벌 시장에 대량 유입되면서 역내 기업들의 이익 체력은 이미 크게 훼손되었다. 유럽 연합이 수입산 철강에 대한 무역 쿼터제를 시행하고 고율의 관세 장벽을 구축하면서 최근 역내 철강사들이 수입산의 공세로부터 일정 부분 차단되어 최저 가동률을 방어하고 현금 흐름을 유지하는 수혜를 입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보호무역 조치는 급격한 붕괴를 지연시키는 일시적인 방어선일 뿐, 본질적인 체질 개선이나 시장의 자생적인 상승 기조를 담보하지 못한다.
정부 보조금을 통해 초기 설비 투자 비용의 일부를 보전받는다 하더라도, 실제 가동 이후 발생하는 막대한 운전자본과 운영 비용은 더 큰 마찰을 유발한다. 전기로가 정상적인 효율을 내며 가동되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안정적인 재생에너지 전력망과 탄소 규제 기준을 충족하는 고품질 소모재의 조달이 필수적이다. 현재 유럽 내 친환경 전력 인프라는 공급 불안정성과 높은 단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며, 환경 규제가 투입되는 전력의 성격뿐만 아니라 원재료와 소모재의 전반적인 질적 수준까지 까다롭게 검증하기 때문에 기업이 부담해야 할 운영 원가는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철스크랩 수급 구조 역시 현재는 경기 둔화에 따른 가동률 저하로 역외 수출이 통제되며 아시아권 대비 일시적인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으나, 향후 국가 단위의 보조금에 등 떠밀린 전기로 신설이 본격화되면 역내 고품질 스크랩을 확보하기 위한 가용한 자원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며, 공급망의 영속성을 장담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자생적 마진 확보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무리하게 추진되는 공정 전환은 철강 산업 전반의 구조적 파산을 초래할 위험을 내포한다.
수요의 근간이 되는 유럽의 전방 산업 또한 장기적인 침체 기조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철강 소비력을 받쳐주지 못하고 있다. 철강재의 주요 전방 수요처인 대규모 인프라 건설, 자동차 제조, 부동산 시장 등은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력 저하와 성장 정체를 겪고 있다. 모든 재화와 원가가 비싸지는 거시경제적 환경 속에서 인프라 투자를 위한 막대한 자본을 원활히 조달하기란 구조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분쟁이 종전 국면으로 전환되는 시나리오는 정체된 유럽 철강 시장의 하방을 지지하고 단기적인 특수 사이클을 유도할 수 있는 강력한 변수임은 분명하다. 재건 사업이 본격화되면 지리적 인접성과 물류 효율성을 확보한 유럽 역내 철강사들이 우선적인 수혜를 입을 가능성이 크다. 혹자는 중국산 저가 제품이 재건 시장을 잠식할 것이라는 의견을 낼 수도 있겠지만, 재건 자금을 주도적으로 집행하고 원조를 제공하는 주체가 미국과 유럽연합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정치·경제적 명분상 중국산 철강재의 유입은 철저히 차단될 확률이 높다. 이로 인한 특수 수요는 위축된 유럽 철강사들에게 일시적인 마진 회복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전기로 전환 시나리오 중 또 하나의 병목 구간은 후방 가치 사슬의 최상단에 위치한 대구경 전극봉과 티어1 니들코크스 시장의 공급 제약이다. 유럽 내 구축된 상당수의 전기로는 설비 자체의 연식과 관계없이 구경 600에서 700mm급의 대형 전극봉을 사용하도록 설계되어 있어 조업의 기술적 효율성 자체는 낮지 않다. 그러나 이 초고전력 전기로용 대구경 전극봉 시장은 전 세계적으로 공급처가 극히 제한된 전형적인 니치 마켓이자 고도의 기술 장벽이 존재하는 과점 구조이다. 범용 저가 전극봉 시장은 중국산 물량 과잉으로 단가가 하락하고 있지만, 고장력 합금강이나 자동차 외판재 생산에 필수적인 UHP 대구경 전극봉과 고순도 티어1 니들코크스는 조달처가 극히 한정되어 있다. 철강사들이 아무리 자금을 투입해 전기로 가동 캐파를 늘리더라도, 이 핵심 소모재를 적기에 안정적으로 확보하지 못하면 조업 효율성과 수율은 급격히 저하될 수 있다.
유럽 철강사들이 공급망 안정을 위해 역내 및 북미 기반의 주요 전극봉 플레이어들과 장기 공급 계약 수립을 타진하고 있으나, 이 역시 상당한 불확실성을 안고 있다. 역내 전극봉 생산업체들은 높은 탄소 배출권 비용과 에너지 가격 압박을 버티지 못하고 공장을 폐쇄하거나 지분을 매각하며 구조적으로 퇴출당하는 경로를 밟고 있다. 북미의 주요 플레이어들 또한 재무적 상흔과 인력 채용의 한계로 인해 휴지 상태인 생산 설비를 정상 가동하는 데 난항을 겪는 실정이다. 대안으로 부상하는 인도계 전극봉 기업들이 저렴한 인프라 비용을 무기로 전 세계 전기로 증설 수요를 흡수하고 있으나, 이는 유럽 철강사들이 핵심 소모재의 통제권을 상실하고 외부 공급망에 대한 종속도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결과적으로 유럽 철강 산업은 관세 장벽과 전쟁 특수라는 인공호흡기를 통해 공정 전환을 위한 시간을 벌고 있을 뿐, 내부의 재무적 체력 한계와 전방 수요 둔화, 그리고 후방 원자재 공급망의 물리적 제약이라는 본질적인 삼중고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구조적 비용 상승과 수급 불균형으로 인한 진통은 장기간 지속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PS – 전쟁 특수가 두꺼운 꼬리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