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밸류업 과정, 20년의 여정

일본의 밸류업은 단발적 정책이 아니라 장기간의 제도 개혁과 기업 행동 변화를 통해 만들어졌다.

1. 버블 붕괴와 장기 침체의 시작

1990년대 초 일본 경제는 자산 가격 거품이 무너진 충격으로 급격한 디레버리징 국면에 들어갔다. 1980년대 후반 부동산과 주식 가격은 급등했고, 기업과 개인은 자산을 담보로 과도한 차입을 일으켜 투자를 확대했다. 1989년 일본은행이 단계적 금리 인상에 나서면서 유동성이 빠르게 흡수되었고, 1991년을 기점으로 부동산과 주가가 동반 폭락했다. 닛케이225 지수는 1989년 3만9천엔에서 1992년 1만4천엔 수준까지 하락했고, 도쿄 중심부 상업지 가격은 고점 대비 80% 이상 떨어졌다.

자산 가격 하락은 곧 기업 대차대조표의 악화로 이어졌다. 보유 부동산과 주식이 시가로 평가되면서 기업의 순자산이 크게 줄었고, 부채비율이 급등했다. 은행들은 담보가치 하락으로 대출을 회수하거나 연장하지 않았고, 부실채권이 급격히 늘어나 금융시스템 불안이 심화되었다. 이른바 ‘대차대조표 불황’이 시작된 것이다. 기업들은 미래 투자를 중단하고 기존 부채를 상환하는 데 현금흐름을 집중했다. 이 과정에서 설비투자는 장기간 감소세를 보였고, 고용도 줄어 임금과 소비가 위축되었다.

일본 정부는 경기 부양을 위해 금리를 빠르게 인하했고, 대규모 재정지출을 반복했다. 1995년 기준금리는 사실상 제로 수준까지 떨어졌고, 공공투자 중심의 대규모 경기부양 패키지가 잇따라 발표되었다. 그러나 수요 진작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기업과 가계 모두 차입을 줄이고 현금 비중을 늘리는 데 집중했기 때문이다. 디플레이션 압력은 점차 강화되었고, 물가상승률은 1990년대 후반부터 장기간 0%대에 머물렀다.

2. 기업 지배구조 개혁의 초입

버블 붕괴 이후 일본 경제의 장기 침체는 금융시스템 개혁 없이는 해소되기 어려웠다. 정부는 1990년대 후반부터 금융시장 자유화와 기업 회계 투명성 제고를 핵심 과제로 삼았다. 1997년 시작된 금융빅뱅 정책은 증권·보험·은행 간 장벽을 허물고, 시장 중심의 금융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시도였다. 이 개혁의 중요한 축 중 하나가 회계제도의 국제화였다. 1990년대 후반부터 연결재무제표 작성이 의무화되었고, 1999년에는 시가회계제도가 도입되었다. 이 변화는 기업의 자산·부채를 시가로 평가하게 만들어 과거처럼 장부가로 보유자산을 유지하며 평가손실을 감추는 관행을 차단했다.

시가회계제도의 도입은 기업의 교차지분 구조를 해체하는 촉매 역할을 했다. 일본 기업들은 전후 성장기부터 거래처, 계열사, 금융기관과 상호출자 관계를 맺어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그러나 보유 주식의 시가 변동이 손익계산서에 반영되면서, 교차지분은 손실의 원천으로 변했다. 특히 주가가 장기 침체 국면에 머물던 1990년대 후반에는 보유 주식에서 대규모 평가손실이 발생해 기업의 자기자본을 잠식했다. 이로 인해 상호출자 비중은 1990년대 초 50%대에서 2000년대 후반 10%대까지 급격히 낮아졌다.

한편 은행 시스템의 부실채권 문제는 1990년대 말까지 일본 경제의 가장 큰 리스크였다. 정부는 1998년 금융재생법과 금융기능강화법을 제정해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부실은행을 정리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산업재생기구(IRCJ)가 설립되어 대규모 구조조정을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좀비기업으로 불리던 만성 적자기업들이 퇴출되거나 사업부 매각·채무재조정에 나섰다. 은행들은 대출금 회수에 집중하며 대손충당금을 늘렸고, 결과적으로 대차대조표가 점차 정상화되었다.

구조조정과 불량채권 정리를 거친 일본 기업들은 2000년대 중반 들어 재무 레버리지를 크게 줄였다. 순차입금이 줄고, 현금성 자산 비중은 높아졌다. 이 변화는 단기적으로 재무 안정성을 높였지만, 동시에 일본 기업들이 과도하게 보수적 자본 정책을 채택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규모 투자와 M&A보다는 내부유보를 늘리고, 현금 보유를 최우선으로 삼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3. 자본 효율성 제고 요구의 확산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일본 기업의 낮은 자본 효율성은 국내외 투자자 모두에게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일본 상장사의 평균 ROE는 5% 내외로 글로벌 주요국 대비 크게 낮았고, 특히 대기업 가운데 순현금 비중이 과도하게 높은 곳이 많았다. 투자자들은 기업이 현금을 활용하지 않고 쌓아두는 행위를 기회비용 측면에서 비효율로 평가했다. 낮은 자본 비용에도 불구하고 설비투자, 연구개발, M&A보다는 현금 유보를 선택하는 경향은 일본 시장의 ‘자본 비효율성’으로 지적되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해외 투자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연기금, 행동주의 펀드, 글로벌 장기 투자자들은 일본 기업에 대해 ROE 개선과 잉여현금의 주주환원을 요구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일본 기업들이 세계에서 가장 건전한 재무구조를 가진 집단으로 부각되자, 외국인 투자자는 일본 주식에 재진입하면서 동시에 ‘현금 더미’를 쌓아둔 기업들에게 배당 확대, 자사주 매입, 비핵심 자산 매각을 요구했다.

정부와 도쿄증권거래소도 이러한 요구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2013년 출범한 아베노믹스의 성장 전략은 ‘기업의 수익력 강화’를 핵심 축으로 삼았다. 2014년 스튜어드십 코드가 도입되면서 기관투자자들은 투자기업과의 지속적 대화를 통해 장기 기업가치 제고를 촉진할 의무를 부여받았다. 이로 인해 일본 시장에서도 ‘주주활동’라는 개념이 확산되었고, 기업-투자자 간 대화가 정례화되었다. 2015년에는 기업지배구조 코드가 시행되었다. 이 제도는 이사회에 독립 사외이사를 2명 이상 두고, 자본 비용을 고려한 경영 전략을 공시하도록 요구했다.

기업의 반응도 점차 구체화되었다. 많은 기업들이 중기 경영계획에 ROE 목표를 명시하기 시작했고, 경영진 보수체계에 ROE나 주가와 연동된 인센티브를 도입했다. 대형 제조업체와 상장 금융사는 기존의 내부유보 중심 자본 정책에서 벗어나 배당성향을 높였고, 자사주 매입을 정기화했다. 이러한 변화는 일본 기업의 ROE를 서서히 끌어올렸고, 주가수익비율(PER)과 주가순자산비율(PBR)도 점진적으로 회복되었다.

다만 이 시기의 변화는 여전히 부분적이었다. 일본 기업 다수는 여전히 순현금 상태를 유지했고, 보수적 투자 성향을 크게 바꾸지 않았다. 자본 효율성 제고 요구가 본격적인 ‘밸류업’ 흐름으로 이어지려면 기업문화 차원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많았다. 이 과제는 이후 2020년대 들어 도쿄증권거래소 개혁과 PBR 1배 미만 기업 압박으로 이어지면서 한 단계 더 진전된다.

4. 도쿄증권거래소의 개혁 압박

2023년 이후 도쿄증권거래소는 자본 효율성이 낮은 상장사에 대한 압박을 전례 없이 강화했다. 구체적으로 PBR이 1배 미만인 기업에 대해 ‘자본 비용과 주가를 의식한 경영’을 요구하며, 개선 계획을 공개하도록 권고했다. 이는 단순한 권고 수준이었지만, 사실상 시장에서 투자자들의 압력과 결합되어 강력한 행동 유인이 되었다. 일본 기업은 그동안 낮은 PBR을 구조적 현실로 받아들이고 장기간 방치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번 조치는 ‘저평가 상태를 경영 과제’로 공식화했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개혁의 배경에는 일본 주식시장의 만성적 저평가 문제가 있었다. PBR 1배 미만 기업 비중은 2022년 기준으로 50% 이상에 달했고, 특히 제조업·은행·지방기업은 장기간 시장가치가 청산가치 이하에 머물렀다. 이 현상은 단순히 시장의 오해라기보다, 자본 효율성 저하와 현금 보유 과잉, 성장 투자 부족에서 비롯된 구조적 문제였다. TSE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일본 시장이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외면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고, 상장사들에게 적극적인 자본 정책과 시장 커뮤니케이션을 촉구했다.

기업들의 대응은 빠르게 나타났다. 다수의 상장사가 ROE·ROIC 목표치를 포함한 중기 경영계획을 발표했고, 구체적 자본 활용 계획을 투자자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자사주 매입 발표가 사상 최대 규모로 늘었고, 배당성향을 장기적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계획도 잇따랐다. 일부 기업은 비핵심 자산 매각, 사업 포트폴리오 재편, 경영진 교체 등 근본적 구조개혁에 나섰다. 특히 과거까지는 투자자 압력에 둔감했던 중소형·가족 경영 기업들까지도 이사회에 독립 사외이사를 늘리고, 자본 비용을 고려한 신규 투자 기준을 도입하는 사례가 증가했다.

이러한 흐름은 일본 시장 전반에 ‘밸류업’이라는 키워드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과거에는 배당 확대나 자사주 매입이 일회성 이벤트로 인식되었다면, 최근에는 이를 장기적 기업가치 제고 전략의 일부로 보는 시각이 자리잡았다. 행동주의 펀드와 글로벌 기관투자자들도 TSE의 개혁 방향을 지렛대 삼아 일본 기업에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5. 해외 투자자

밸류업 과정에서 해외 투자자는 단순한 외부 주주를 넘어 중요한 변화의 촉매였다. 일본 상장사 중 상당수는 자본 효율성이 낮고, 주가순자산비율(PBR)이 1배 미만으로 오랫동안 거래되었다. 이 현상을 장기 투자자들은 구조적 저평가로 보았고, 행동주의 펀드와 글로벌 연기금은 적극적으로 기업 개입에 나섰다.

엘리엇, 서드포인트, 밸류액트같은 행동주의 펀드는 일본 시장에서 대표적인 목소리를 냈다. 이들은 기업에 배당 확대, 자사주 매입, 비핵심 자산 매각, 사업 포트폴리오 재편을 요구했다. 예를 들어, 서드포인트는 소니에 영화·음악·게임 부문 분할을 제안했고, 엘리엇은 소프트뱅크 그룹에 대규모 자사주 매입을 촉구해 실제 실행으로 이어졌다. 이런 개입은 단순한 공격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기업가치를 높일 수 있는 전략적 선택지를 이사회가 검토하도록 압박하는 역할을 했다.

과거 일본 기업들은 외부 주주의 요구에 방어적으로 대응하거나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상호출자 구조와 내부자 중심 이사회가 방어막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0년대 중반 이후 지배구조 코드가 정착하고, 독립 사외이사 비중이 확대되면서 기업과 투자자 간 대화 채널이 열렸다. 점차 일본 기업들은 주주와의 대화(IR 미팅, 엔게이지먼트 세션)를 정례화했고, 일부 기업은 행동주의 펀드의 제안을 수용해 경영계획에 반영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일본 시장이 글로벌 스탠다드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해외 투자자들은 일본 기업의 자본 비용을 명확히 인식하도록 유도하고, ROE나 PBR 같은 지표를 경영 의사결정의 핵심에 두도록 압박했다. 그 결과, 단순히 배당을 늘리는 수준을 넘어, 기업 지배구조와 투자전략 자체가 주주가치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6. 마무리

일본의 밸류업은 장기 침체라는 문제 인식에서 출발했다. 버블 붕괴 이후 일본 기업은 대차대조표를 정리하고 재무 안정성을 확보했지만, 그 대가로 자본 효율성이 낮아지고 성장 투자가 위축되었다. 이 상황이 주가 저평가를 고착화시키자 정부와 거래소는 금융빅뱅, 시가회계제도, 지배구조 코드, 스튜어드십 코드 같은 제도 개혁으로 기업 행동을 바꾸려 했다. 그 결과 교차지분 해체, ROE 목표 설정, 배당 확대, 자사주 매입 확대 등 구체적 변화가 나타났고, 최근에는 PBR 1배 미만 기업을 압박하는 TSE 개혁까지 이어졌다. 해외 투자자의 참여도 기업 지배구조를 글로벌 스탠다드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물론, 아직 과제는 남아 있다. 현금 과잉, 저성장 업종, 인구 감소 등 구조적 제약은 여전히 존재하고, 모든 기업이 자본 비용을 경영 판단의 중심에 두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일본은 문제를 인식하고 제도와 시장의 압력을 통해 기업 행동을 변화시켰고, 그 과정에서 밸류업이라는 이름의 시장 재평가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한국 증시의 밸류업 논의도 이 경험에서 배울 점이 있다. 단순히 PBR 1배를 올리자는 목표 설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업이 왜 저평가되는지, 어떤 구조적 비효율이 존재하는지부터 분석하고, 지배구조 개혁·자본 효율성 제고·투자자 커뮤니케이션 강화 같은 구체적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 일본의 사례는 밸류업이 이벤트가 아니라 장기적 체질 개선 과정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PS – 한두 번의 정책으로는 밸류업이 완성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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