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가 좋아질수록 OEM의 마진은 줄어들고, 산업의 호황은 부품업체가 가져간다. PC OEM 산업의 진실은 늘 이 딜레마에서 출발한다.
1. 사업부 분리
HP는 2015년 PC와 프린터 중심의 HP와 서버·스토리지·클라우드 중심의 HPE로 분리했다. 표면적으로는 조직 재편이지만, 자본 배분과 산업 구조 관점에서는 성격이 훨씬 명확했다. PC와 프린터는 성장률이 낮고 잉여현금흐름이 꾸준한 사업이고, 서버·클라우드는 경기와 기술 변화의 영향을 받는 성장 사업이었다. 같은 회사 안에 있을 경우 투자자의 기대와 할인율이 엇갈리고, 내부 자원 배분에서도 충돌이 생긴다. 성장 사업은 자본 투입이 필요하고, 비성장 사업은 현금 회수가 효율적인데, 이를 한 조직에서 동시에 최적화하기 어렵다.
분리 이후 HP는 사실상 성장보다 현금 회수와 효율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PC와 프린터는 브랜드, 유통, 조달, 유지보수 같은 실무적 역량이 중심이었고, 고객도 소비자와 기업·공공을 섞은 구조였다. 반면에 HPE는 기업 인프라와 클라우드 경쟁 속에서 자본 투입을 통해 성장을 추구했다.
2. 프린트 사업부
프린터 사업은 설치 대수와 반복 구매를 기반으로 하는 구조(면도기-면도날 비즈니스 모델)다. 기계 판매는 마진이 낮고 잉크와 토너가 높은 마진을 만든다. 이 모델의 핵심은 설치 기반, 반복 수요, 기계·소모품·서비스의 결합이다. 소모품은 고객에게 귀찮은 재화지만, 그렇기 때문에 재구매율이 높고 브랜드 호환성이 낮다. 이 요소가 락인을 만들고, 매출보다 잉여현금흐름이 비례적으로 크다.
인쇄량은 디지털 전환 이후 꾸준히 줄었지만, 줄어드는 속도는 극단적으로 느리다. 기업·공공·교육은 보안과 규정, 문서 보관과 업무 관성이 있어 급격한 축소가 어렵다. 재무 관점에서 보면 이 사업은 서서히 줄어드는 시장에서 오랫동안 현금을 뽑아내는 사업이다. 고성장 시장과 달리 재투자를 고민할 필요가 없고, CAPEX 부담이 낮으며, 설치 기반은 감소하지만 마진 구조는 무너지지 않는다.
3. PC OEM의 아이러니
PC OEM 산업은 기술 산업처럼 보이지만 수익 구조는 유통 산업에 가깝다. 수요가 좋아질 때는 부품 가격이 올라 OEM이 공급망 후순위에 밀리고, 부품 공급이 원활할 때는 소비자 경쟁이 심해져 가격이 눌린다. 즉 산업 호황은 부품업체에게 이익이 되고, 산업 불황은 판매업체에게 부담이 된다. 일반적인 산업에서는 호황이 수익의 기회인데, PC에서는 오히려 압박이 된다.
고객 기반도 과거에는 소비자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기업·공공이 중심이다. 기업은 구매 가격보다 사용 과정의 총비용을 중시한다. 보안, 드라이버 안정성, 유지보수, 수리, 원격 관리, 인증, 열 관리, 워크로드 적합성 등이 중요해졌다. 이 영역에서는 레노버와 델이 더 선호되고, 고성능 설계나 워크스테이션 시장에서도 두 회사가 앞서 있다. 게이밍도 데스크톱은 조립이 강하고 노트북은 다른 경쟁사의 제품이 더 유리하다. HP는 범용 시장에서 강하지만 분화된 시장에서는 경쟁력이 낮다.
최근 지급 방식이 통일형에서 맞춤형으로 바뀌고 있고, 일부는 개인 장비를 업무용으로 쓰는 방식이 늘고 있다. 애플은 이 흐름에서 가장 큰 수혜를 받는다. 문제는 분화가 성장으로 보이지만, HP 입장에서는 역풍이라는 점이다. 범용 시장은 규모와 가격에서 HP가 유리하지만, 분화 시장은 성능과 설계에서 HP가 불리하기 때문이다. 산업이 성장할수록 HP가 얻는 몫이 줄어드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PC OEM 산업의 잔존가치가 낮은 이유는 이 산업이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클라우드와 반도체, 메모리, 네트워크, 서버, 워크스테이션 쪽으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HP는 그 가치 이동의 끝단에 있다.
4. 밸류에이션
HP의 가치는 성장에서 나오지 않고 회수에서 나온다. 잉여현금을 배당과 자사주 매입으로 돌려 내부수익률을 설정하는데, 이 방식은 손실을 줄이는 데 매우 강력하지만, 반대로 높은 수익률을 얻기 어렵다. 기업과 공공의 조달 특성상 점유율이 흔들리지 않아 잔존가치는 생각보다 오래 유지되지만, 산업 변화는 장기 잔존가치를 낮추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확실한 것은 현재 밸류(약 177억 불)가 낮다는 것이다. HP는 시장이 기대할 수 있는 수준보다 낮은 멀티플과 낮은 내부수익률 기준에서 거래된다. 손실 가능성은 낮고, 잉여현금흐름은 유지되며, 배당과 자사주 매입이 지속 가능한 수준이고, 업황이 흔들려도 점유율이 급격히 바뀌지 않는다. 즉 단기·중기 기준으로 보면 이 가격대는 손해 보기 어려운 영역이다. 만약 강제로 자본을 배분해야 한다면 델이나 레노버보다 내부수익률이 더 높은 쪽은 HP가 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가격이 싸다는 사실이 곧 투자 이유가 되진 않는다. 투자자는 내부수익률뿐 아니라 기회비용을 고려해야 한다. 산업이 성장하지 않고, 평가가 확장되지 않고, 잔존가치가 낮아지고, 산업 가치가 상류로 이동하는 구조에서는 자본을 배분할 이유가 약해진다. 즉, 결론은 단순하다. HP는 싸기 때문에 매력이 있지만, 싸지 않으면 매력이 없다.
5. 마무리
HP는 손실을 방어하는 기업이고, 시장은 수익을 찾는다. 안정에 강하고 확장에 약하다. 프린터는 천천히 줄어도 현금이 오래 나오는 사업이고, PC는 산업이 좋아질 때 OEM이 덜 가져가는 구조다. 지금 가격은 낮고 손실 가능성은 작지만, 높은 수익을 기대할 자산은 아니다. HP는 공포 국면이나 심리적 할인 상황에서는 고려할 수 있지만, 평시에는 자본 배분의 기회비용이 크다. 성장으로 접근하는 자산이 아니라 가격으로 접근하는 자산이다.
PS – 꼭 컴퓨터를 사야할 땐 PC 부품 값이 고공행진을 한다. / NPU를 탑재한 AI PC가 나온다면 상황이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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